유차영의 아랑가(我浪歌)
전통가요 새로운 이름패, <빈대떡 신사> 1947
백운악·양원배·한복남
우리 전통가요를 포괄하는 통념적인 단어·용어, <트로트>에 새 이름을 붙여야 할 때가 왔다.
전가신명(傳歌新名)의 시대가 온 것이다. 문화예술의 글로벌 한류풍(韓流風)이 그 증거이고 징표이다.
늦었다는 각성이 반추되는 지금이 적기이다.
이 새로운 이름을 아랑가(我浪歌·ArangGA)로 하자.
이는 우리의 가장 고유한 전통 유행요(流行謠) 《아리랑》과 노래를 상징하는 가장 통속적인 단어 《가요》를 융합한 말이다.
아랑가는 나(우리)의 내면적인 감흥과 육신의 어깨와 엉덩이와 허리통을 덩실덩실 요동치게 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 노랫말을 올올이 풀어헤친다.
1947년에 세상에 나온 노래이니, 전통가요라는 이름에 걸맞고,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물리력의 상징인 돈(錢, 전)이 소재이고, 사투리나 방언이 없는 ‘돈’이라는 말이 오선지 위에 드러누웠으니, 전가신명(傳歌新名)의 절창에 적격이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밖에서 /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 들어갈 땐 뽐을 내며 들어가더니 /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 뒷문으로 도망가다 붙잡히어서 /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 와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서워 / 에헤헤헤 우습다 왜헤헤헤 우서워 / 와하히히 우하하하 우습다 /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 기생집이 무어냐.
돈과 권력 중, 어느 것이 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셀까. 돈이다.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이 돈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돈의 지배력이라는 것은, 권력을 잡는 수단에 영향을 미치는 물리력과 감성 지배력을 말한다.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겉으론 항변하는 이들이 있으련만 안팎으로 솔직해지기를 지침한다.
이런 맥락으로 역사의 노드와 현실 속의 감성과 통념적인 관념을 되짚어보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의식적 차등과 현실적인 작용 반작용이 역사의 갈피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선비(붓과 먹), 농업(땅과 땀), 공장(쟁이, 기술과 제조), 상인(생산 제조품의 판매)이 그 의미인데, 시대와 세대와 개인(가문)에 따라 이에 대한 관점은 달랐다.
하지만 그 맥락에는 돈이라는 통로가 걸쳐 있다. 돈은 왜 힘이 센가. 사람들이 그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돈은 전(錢)으로 쓰고, 돈으로 읽는다. 돈이라는 말은 사투리가 없다.
서울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울릉도 제주도 강화도~ 어디를 가도 같은 말(문자)이다.
코 묻은 돈, 똥 묻은 돈, 구겨진 돈, 새 돈, 헌 돈~ 모두 다 그 힘(액면가)이 같다. 그 힘은 세상에 소통되는 신용이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통념이 소소불편(疏疏不便)이라는 현실과 엇대인다.
이런 풍념난상(風念亂想) 마음 그림을 그리면서, 한복남의 유행가 <빈대떡 신사>를 풀어헤친다.
<빈대떡 신사> 노래는 작사·작곡·발표 연도와 관련하여 설이 많다.
1943년 한복남의 데뷔곡이라는데, 한복남은 1947년 해방광복 후 남쪽으로 와서, 김해송이 이끌던 KPK악단원이 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흘러간 노래방(운영자:부암)에는 1943년 백운악 작사 양원배 작곡 한복남 노래로 가사와 음원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음반발매 정보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자료에는 1947년 아세아레코드에서 처음 음반으로 발매했다가, 1954년 한복남이 창립한 도미도레코드에서 재발매했다는 내용을 명세했다.
<빈대떡 신사> 노래는 해학·풍자·익살적이기도 하지만,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와 해방광복(1945) 미군정기(1945~1948)에 이어진 6.25전쟁(1950~1953)과 전쟁 후, 피폐한 그 당시 상황을 적확(的確)하게 묘사했다.
문화의 흐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혹은 서쪽에서 동쪽으로도 상관하지 않는다.
식민시절 이건 전쟁 상황이건, 통치체계와 물리적 힘의 형평과 기울기와 상관없이 민초들의 삶은 그 형상과 감흥이 물동이에 담겨지는 물과 같다.
한복남은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작사·작곡·가수에 레코드사가지 포털했었다.
1919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하여 1991년 73세로 서울에서 타계했다. 우리나라 해방 이후 제1호 가수등록을 한 현인(현동주)과 동갑내기였다.
본명은 한영순(韓榮淳), 안주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온 가족이 월남하여 서울 종로에서 양복점을 열었다가 그해 가수로 데뷔했다.
그가 운영하던 양복점에 작곡가 박시춘과 김해송도 왔었단다. 그때 김해송에게서 <저무는 충무로>를 받아 가수로 데뷔했단다. 이 가수 데뷔연도와 <빈대떡 신사>의 발표시기가 설담의 대상이다.
1950년 6.25전쟁 중 부산에서 도미도레코드사를 창립하였으며, 도미도레코드·라라레코드·아세아레코드·오아시스레코드 등에서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자신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금사향·한정무·손인호·현인·김정애·황금심·박재홍·황정자·남백송·심연옥 등 195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가수들이 그를 통해 배출되었다.
그가 지은 곡조는 <앵두나무 처녀>, <빈대떡 신사>, <엽전 열 닷냥>, <처녀 뱃사공>, <오동동 타령>, <코리안 맘보>, <봄바람 님바람>, <나의 탱고>, <진주는 천리길>, <한 많은 대동강>, <백마강>, <경상도 사나이>, <님>, <페르샤 왕자> 등이다.
아버지가 모아준 아까운 전 재산을 / 다 부러 먹고 마즈막엔 마즈막엔 / 양복을 잡혀도 요릿집만 / 쳐다보는 점잖은 신사 같지만 / 주머니엔 한 푼 없는 새파란 건달 / 요리 먹고 술 먹을 땐 뽐을 냈지만 / 매 맞는 꼴이야 매 맞는 꼴이야 / 와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서워 / 에헤헤헤 우습다 왜헤헤헤 우서워 / 와하히히 우하하하 우습다 /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 기생집이 무어냐.
노랫말에 오늘날, 세속에 어른거리는 권력을 가졌거나 이를 지향하는 이들의 일그러진 상판(얼굴)이 겹친다. 돈을 탐했으면, 그리고 잘 못 취했다면(취하려 했다면) 법리의 매라도 맞아야지. 그냥 딱 잡아뗀다. 노래 속 화자는 뽐을 잡으며 드셨지만, 돈 없음이 탈로나서는 매를 맞고 있지않는가.
요즘 권세를 지향하는 철새, 정조(政鳥)들은 먹을 때나, 먹고 난 후 현장에서의 증물(贈物)을 현상으로 내보여도 내몰라라다. 둘러댄다.
그야말로 우하하하하~ 우습다. 왜헤헤헤~ 신물 난다. 그들이 <빈대떡 신사>를 모를 리가 있나. 뚝 잡아떼거나 안면몰수로 모른 체 하는 것이리라. 뻔뻔하다. 가상하다.
한복남의 데뷔 연도와 데뷔곡 등에 대한 착오는, 1991년 그가 타계했을 때, 신문에 실린 그의 부고기사(1991.1.23)에서 연유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설명이다.
그러나 한복남의 친필 악보에는 1946년 5월 20일 <빈대떡 신사>를 작곡한 것으로 명시했단다. 한복남의 자녀 3남2녀 중 장남 한기송은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과의 인터뷰에서, 부친이 <빈대떡 신사>를 직접 작사 작곡했지만, 당시 가수가 곡을 쓰면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분위기 때문에 트럼펫 연주자 양원배를 작곡자로 백운악을 작사자로 음반에 표기했단다.
이 노래가 탄생한 1940년대 후반, 저잣거리에는 대폿집과 요릿집이 상존했다.
전자는 서민의 주막, 후자는 양민의 요정 같은 서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식 요릿집은 명월관이다. 1909년 최초로 설립된 장소는 현, 일민미술관 자리다. 신라·조선·서양식을 혼합한 건물이었으며, 조선시대 우포도청이 있던 자리다.
1층은 온돌, 2~3층은 한·양식 혼용의 마루였다. 1919년 화재로 완전히 불에 탔으며, 1925년 9월 27일 동아일보 새 사옥을 착공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52(세종로). 1906년에 설립했다는 기록도 있다. 착공과 준공, 광고와 운영 등과 연계한 자료들로 판단된다.
1909년 황토마루에 개업한 이후, 1915년경 인사동에 분점 태화관을 개업했다. 인사동 194번지-27호, 태화빌딩 자리. 이 건물은 이완용 소유로 종로 인사동 순화궁(인사동)을 개조한 것이었단다.
이곳에서 이완용은 이또오 히로부미와 회담도 했었단다. 태화관은 이완용이 5년간 거주하다가 빌려주고 떠난 곳이란다. 이후 태화관은 감리교에 넘어간 후 태화여자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태화관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33명 중 29명)들이 독립선언서를 낭송하고 종로경찰서로 자수한 후 연행되었던 장소이고, 안주인은 주영옥은 손병희 선생의 지인이었단다.
그날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사교 1호실에서 태극기에 경례하고, 궁중요리사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함으로써 종로경찰서로 갔다.
당시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올 때 인력거를 가지고 오자, 자동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고, 그래서 택시 일곱 대에 나눠 타고 경무총감부에 갔단다. 그해 5월 황토마루 명월관 본점이 화재를 당하고, 이듬해 요릿집 장충관을 운영하던 이종구가 명월관 상호를 사들임에 따라 돈의동(현, 피카디리 자리)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1921년 청량리에 출장소가 신설되었고, 1923년 서린동에 분점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돈이 더 센가, 권좌를 탐하는 정조(政鳥)들이 더 강한가. 당연히 돈이다. 치인들은 민생을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탐하고, 자리를 점하면 뒷돈에 따라 거동하기 때문이다.
거들의 거동 엔진은 바로 돈이다. 양복 입은 신사가 검은돈에 조종당하고 있다. 저들이 차라리 <빈대떡 신사>이면 좋겠다.
전가신명(傳歌新名)의 새 시대를 열어가자. 전통가요의 통념적인 이름패(장르·단어·용어)를 《트로트》에서 《아랑가》로 통칭하자.
트로트라는 단어의 원조 격인 폭스 트로트(Fox Trot)는, ‘여우가 빠르게 달린다’의미다. 이는 사전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우리의 고유한 전통가요를 포괄하는 이름패라고 하기에는, 새로운 각성(覺性)이 절실한 용어이다.
글·사진 : 유차영(한국아랑가연구원장/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유차영의 아랑가(我浪歌)
전통가요 새로운 이름패, <빈대떡 신사> 1947
백운악·양원배·한복남
우리 전통가요를 포괄하는 통념적인 단어·용어, <트로트>에 새 이름을 붙여야 할 때가 왔다.
전가신명(傳歌新名)의 시대가 온 것이다. 문화예술의 글로벌 한류풍(韓流風)이 그 증거이고 징표이다.
늦었다는 각성이 반추되는 지금이 적기이다.
이 새로운 이름을 아랑가(我浪歌·ArangGA)로 하자.
이는 우리의 가장 고유한 전통 유행요(流行謠) 《아리랑》과 노래를 상징하는 가장 통속적인 단어 《가요》를 융합한 말이다.
아랑가는 나(우리)의 내면적인 감흥과 육신의 어깨와 엉덩이와 허리통을 덩실덩실 요동치게 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 노랫말을 올올이 풀어헤친다.
1947년에 세상에 나온 노래이니, 전통가요라는 이름에 걸맞고,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물리력의 상징인 돈(錢, 전)이 소재이고, 사투리나 방언이 없는 ‘돈’이라는 말이 오선지 위에 드러누웠으니, 전가신명(傳歌新名)의 절창에 적격이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밖에서 /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 들어갈 땐 뽐을 내며 들어가더니 /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 뒷문으로 도망가다 붙잡히어서 /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 와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서워 / 에헤헤헤 우습다 왜헤헤헤 우서워 / 와하히히 우하하하 우습다 /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 기생집이 무어냐.
돈과 권력 중, 어느 것이 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셀까. 돈이다.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이 돈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돈의 지배력이라는 것은, 권력을 잡는 수단에 영향을 미치는 물리력과 감성 지배력을 말한다.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겉으론 항변하는 이들이 있으련만 안팎으로 솔직해지기를 지침한다.
이런 맥락으로 역사의 노드와 현실 속의 감성과 통념적인 관념을 되짚어보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의식적 차등과 현실적인 작용 반작용이 역사의 갈피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선비(붓과 먹), 농업(땅과 땀), 공장(쟁이, 기술과 제조), 상인(생산 제조품의 판매)이 그 의미인데, 시대와 세대와 개인(가문)에 따라 이에 대한 관점은 달랐다.
하지만 그 맥락에는 돈이라는 통로가 걸쳐 있다. 돈은 왜 힘이 센가. 사람들이 그 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돈은 전(錢)으로 쓰고, 돈으로 읽는다. 돈이라는 말은 사투리가 없다.
서울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울릉도 제주도 강화도~ 어디를 가도 같은 말(문자)이다.
코 묻은 돈, 똥 묻은 돈, 구겨진 돈, 새 돈, 헌 돈~ 모두 다 그 힘(액면가)이 같다. 그 힘은 세상에 소통되는 신용이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통념이 소소불편(疏疏不便)이라는 현실과 엇대인다.
이런 풍념난상(風念亂想) 마음 그림을 그리면서, 한복남의 유행가 <빈대떡 신사>를 풀어헤친다.
<빈대떡 신사> 노래는 작사·작곡·발표 연도와 관련하여 설이 많다.
1943년 한복남의 데뷔곡이라는데, 한복남은 1947년 해방광복 후 남쪽으로 와서, 김해송이 이끌던 KPK악단원이 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흘러간 노래방(운영자:부암)에는 1943년 백운악 작사 양원배 작곡 한복남 노래로 가사와 음원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음반발매 정보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자료에는 1947년 아세아레코드에서 처음 음반으로 발매했다가, 1954년 한복남이 창립한 도미도레코드에서 재발매했다는 내용을 명세했다.
<빈대떡 신사> 노래는 해학·풍자·익살적이기도 하지만,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와 해방광복(1945) 미군정기(1945~1948)에 이어진 6.25전쟁(1950~1953)과 전쟁 후, 피폐한 그 당시 상황을 적확(的確)하게 묘사했다.
문화의 흐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혹은 서쪽에서 동쪽으로도 상관하지 않는다.
식민시절 이건 전쟁 상황이건, 통치체계와 물리적 힘의 형평과 기울기와 상관없이 민초들의 삶은 그 형상과 감흥이 물동이에 담겨지는 물과 같다.
한복남은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작사·작곡·가수에 레코드사가지 포털했었다.
1919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하여 1991년 73세로 서울에서 타계했다. 우리나라 해방 이후 제1호 가수등록을 한 현인(현동주)과 동갑내기였다.
본명은 한영순(韓榮淳), 안주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온 가족이 월남하여 서울 종로에서 양복점을 열었다가 그해 가수로 데뷔했다.
그가 운영하던 양복점에 작곡가 박시춘과 김해송도 왔었단다. 그때 김해송에게서 <저무는 충무로>를 받아 가수로 데뷔했단다. 이 가수 데뷔연도와 <빈대떡 신사>의 발표시기가 설담의 대상이다.
1950년 6.25전쟁 중 부산에서 도미도레코드사를 창립하였으며, 도미도레코드·라라레코드·아세아레코드·오아시스레코드 등에서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자신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금사향·한정무·손인호·현인·김정애·황금심·박재홍·황정자·남백송·심연옥 등 195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가수들이 그를 통해 배출되었다.
그가 지은 곡조는 <앵두나무 처녀>, <빈대떡 신사>, <엽전 열 닷냥>, <처녀 뱃사공>, <오동동 타령>, <코리안 맘보>, <봄바람 님바람>, <나의 탱고>, <진주는 천리길>, <한 많은 대동강>, <백마강>, <경상도 사나이>, <님>, <페르샤 왕자> 등이다.
아버지가 모아준 아까운 전 재산을 / 다 부러 먹고 마즈막엔 마즈막엔 / 양복을 잡혀도 요릿집만 / 쳐다보는 점잖은 신사 같지만 / 주머니엔 한 푼 없는 새파란 건달 / 요리 먹고 술 먹을 땐 뽐을 냈지만 / 매 맞는 꼴이야 매 맞는 꼴이야 / 와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서워 / 에헤헤헤 우습다 왜헤헤헤 우서워 / 와하히히 우하하하 우습다 / 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 기생집이 무어냐.
노랫말에 오늘날, 세속에 어른거리는 권력을 가졌거나 이를 지향하는 이들의 일그러진 상판(얼굴)이 겹친다. 돈을 탐했으면, 그리고 잘 못 취했다면(취하려 했다면) 법리의 매라도 맞아야지. 그냥 딱 잡아뗀다. 노래 속 화자는 뽐을 잡으며 드셨지만, 돈 없음이 탈로나서는 매를 맞고 있지않는가.
요즘 권세를 지향하는 철새, 정조(政鳥)들은 먹을 때나, 먹고 난 후 현장에서의 증물(贈物)을 현상으로 내보여도 내몰라라다. 둘러댄다.
그야말로 우하하하하~ 우습다. 왜헤헤헤~ 신물 난다. 그들이 <빈대떡 신사>를 모를 리가 있나. 뚝 잡아떼거나 안면몰수로 모른 체 하는 것이리라. 뻔뻔하다. 가상하다.
한복남의 데뷔 연도와 데뷔곡 등에 대한 착오는, 1991년 그가 타계했을 때, 신문에 실린 그의 부고기사(1991.1.23)에서 연유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설명이다.
그러나 한복남의 친필 악보에는 1946년 5월 20일 <빈대떡 신사>를 작곡한 것으로 명시했단다. 한복남의 자녀 3남2녀 중 장남 한기송은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과의 인터뷰에서, 부친이 <빈대떡 신사>를 직접 작사 작곡했지만, 당시 가수가 곡을 쓰면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분위기 때문에 트럼펫 연주자 양원배를 작곡자로 백운악을 작사자로 음반에 표기했단다.
이 노래가 탄생한 1940년대 후반, 저잣거리에는 대폿집과 요릿집이 상존했다.
전자는 서민의 주막, 후자는 양민의 요정 같은 서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식 요릿집은 명월관이다. 1909년 최초로 설립된 장소는 현, 일민미술관 자리다. 신라·조선·서양식을 혼합한 건물이었으며, 조선시대 우포도청이 있던 자리다.
1층은 온돌, 2~3층은 한·양식 혼용의 마루였다. 1919년 화재로 완전히 불에 탔으며, 1925년 9월 27일 동아일보 새 사옥을 착공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52(세종로). 1906년에 설립했다는 기록도 있다. 착공과 준공, 광고와 운영 등과 연계한 자료들로 판단된다.
1909년 황토마루에 개업한 이후, 1915년경 인사동에 분점 태화관을 개업했다. 인사동 194번지-27호, 태화빌딩 자리. 이 건물은 이완용 소유로 종로 인사동 순화궁(인사동)을 개조한 것이었단다.
이곳에서 이완용은 이또오 히로부미와 회담도 했었단다. 태화관은 이완용이 5년간 거주하다가 빌려주고 떠난 곳이란다. 이후 태화관은 감리교에 넘어간 후 태화여자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태화관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33명 중 29명)들이 독립선언서를 낭송하고 종로경찰서로 자수한 후 연행되었던 장소이고, 안주인은 주영옥은 손병희 선생의 지인이었단다.
그날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사교 1호실에서 태극기에 경례하고, 궁중요리사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함으로써 종로경찰서로 갔다.
당시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올 때 인력거를 가지고 오자, 자동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고, 그래서 택시 일곱 대에 나눠 타고 경무총감부에 갔단다. 그해 5월 황토마루 명월관 본점이 화재를 당하고, 이듬해 요릿집 장충관을 운영하던 이종구가 명월관 상호를 사들임에 따라 돈의동(현, 피카디리 자리)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영업을 시작하게 된다. 1921년 청량리에 출장소가 신설되었고, 1923년 서린동에 분점이 개설되기도 하였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돈이 더 센가, 권좌를 탐하는 정조(政鳥)들이 더 강한가. 당연히 돈이다. 치인들은 민생을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탐하고, 자리를 점하면 뒷돈에 따라 거동하기 때문이다.
거들의 거동 엔진은 바로 돈이다. 양복 입은 신사가 검은돈에 조종당하고 있다. 저들이 차라리 <빈대떡 신사>이면 좋겠다.
전가신명(傳歌新名)의 새 시대를 열어가자. 전통가요의 통념적인 이름패(장르·단어·용어)를 《트로트》에서 《아랑가》로 통칭하자.
트로트라는 단어의 원조 격인 폭스 트로트(Fox Trot)는, ‘여우가 빠르게 달린다’의미다. 이는 사전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우리의 고유한 전통가요를 포괄하는 이름패라고 하기에는, 새로운 각성(覺性)이 절실한 용어이다.
글·사진 : 유차영(한국아랑가연구원장/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