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DV컨퍼런스 정현성 학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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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유차영의 아랑가] ② 1935년 ; 목포의 눈물

[유차영의 아랑가]  ②

1935년 목포의 눈물 

우리나라 최초 콩쿠르 대회 1등

문일석/손목인/이난영


오래 전해온 곡은 오래 이어져간다. 이런 노래가 애창곡이고 국민가요다. 

애창곡은 히트곡과 명곡과는 다르다.

선율과 멜로디가 통속적이고 대중성을 띠는 것이 그 특징인데, 1935년 불린 이래로 세기를 이어져 오는 <목포의 눈물>은 당시 시대상황과 민족감성을 가장 잘 아우른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르고 이난영(1916년생)은 KPK 악단장 김해송과 결혼을 했다. 

사랑하는 연인, 연하의 남자 남인수(1918년생)를 곁에 두고서.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 어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랠 것을 /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가사전문)


이 노래는 1934년 전국 6대도시 애향가사 모집에서, 함흥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목포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던 문일석이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하여 1등한 가사다. 여기에다 손목인의 '갈매기 우는 항구' 멜로디를 입히고, 검영에 통과하지 못한 제목 '목포의 사랑'을 <목포의 눈물>로 고쳐서 이난영이 불렀다.

당시 일본에 본사를 둔 오케레코드 조선지사장(이철)의 기획 산물이다.

일본 제국주의 조선총독부는 1933년부터, 유성기음반취체규칙에 따라 우리 노래를 검열하였고, 그 대표적인 곡이 <황성옛터>, <아리랑>, <희망가>이며 찬송가까지 검열을 하였다. 

당시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25년째 이어지던 시기다. 

무단통치와 문화통치를 거쳐,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황국신민화를 꾀하던 시절. 이난영은 18세, 문일석(본명 윤재희)은 20세, 손목인(본명 손득력, 1913~1999)은 22세였다.


<목포의 눈물〉 2절 노랫말은,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1597.9.16)의 주인공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궤를 같이한다. 

춘원 이광수는 1920년대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하였으며, 1930년 대 초반에도 <성웅 이순신>을 연재했었다. 

전라좌수사 부임으로부터 1598년 순직하여 안장되기까지 7년 동안을 망라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 

이것이 이 노랫말을 작사한 시대적 배경이다.

2절에 “삼백 년 원한 품은~" 구절은 임진왜란 종전 336년이 지나서 다시 나라를 빼앗긴 식민치하의 한을 읊은 것이다. 

"임 자취"는 이순신 장군이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 (13척:133척의 승리)으로 왜적을 물리친 후, 목포 앞바다 고하도(보하도)에 진을 치고, 노적봉에서 지휘를 하던 흔적을 말한다. 

노적봉에 가면 장군의 동상이 늠름하게 목포해역을 굽어보고 있다. 

그해 10월 29일부터 1598년 2월17일 완도 고금도로 이진을 해갈 때까지 107 일 동안 8천여 조선 수군과 1천여 가구의 피란민이 이곳에 주둔했었다. 

이때 만든 것이 '해로통행첩'이다.

본명은 이옥례, 호적상 이름은 이옥순인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양동에서 태어나 삼촌 집에서 목포공립보통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엄마와 함께 제주도로 이주를 한다. 

친오빠 이봉룡은 목포에서 악기점을 운영했었다. 

이때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실력을 높게 평가한 주인이 그녀를 막간 가수로 활동하게 해주었으며, 이때가 1932년 열여섯 살이었다.

이즈음 태평극단에 입단을 하며, 극단장 박승희(대한제국 초대 미국 대사를 지낸 박정양 대감의 셋째아들)가 '난영'이라는 예명을 붙여준다. 

이난영은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남도 판소리가락과 같은 한이 스민 노래를 부른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선우일선의 목청이 옥퉁소라면 이난영은 옥퉁소 구멍이 1/3 정도 막힌 소리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을 가왕으로 만들었고, 1942년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이난영과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으며,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불후의 애창곡으로 세월과 세대를 뛰어넘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8년부터 난영가요제가 열린다. 

이 축제는 49세의 일기로 가왕의 생을 마감한 비련의 여인, 첫사랑 연하남자 남인수를 곁에다 두고 악단장 김해송과 눈물 머금은 결혼을 해야 했던 운명의 여신으로부터 질투를 받는 예인, 숙명처럼 다시 만난 첫사랑 남인수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히고 1962년 6월 26일 44세의 생을 먼저 마감(폐결핵)하게 하고, 자신도 1965년 4월 11일(3·1절 기념공연)을 끝으로 49세의 생을 마감(심장마비)한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을 추모하기 위해 열리는 가요제다. 

이난영이 작고한 3년 뒤인 1968년 호남매일신문사 주최로 처음 개최되었으며, 1991년부터 MBC 주관으로 매년 6월 난영노래공원에서 개최된다.

2006년 4월 11일, 목포항 삼학도에 난영공원이 조성됐다. 

삼학도는 목포시 만호동에 속하는 하중도. 옛날엔 배를 타고 건너갔던 섬,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자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1962년 이로면 입암리 사이 매립으로 육지가 되었다. 

이 섬의 모습이 세마리 학처럼 보여 삼학도라고 불렸다. 

이난영의 타계일(1965년 4월 11일)과 연계한 개장이다. 

이 행사에 맞춰서 이난영의 유해는 3월25일 파주에서 41년 만에 고향의 품으로 돌아와 수목장으로 이곳에 안장됐다. 

600여 평의 부지에 마련된 난영공원은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와 수목장을 지낸 난영나무가 자라고 있다.


2011년 4월 11일, '가요무대'에서 이난영 타계 46주기 및 이난영의 남편 작곡가 김해송 탄생 100년을 맞아 이난영 음악일가를 조명했다. 

이난영의 가족은 남편 작곡가 김해송, 자녀 김시스터즈, 김보이스와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 등 드문 음악가족이다. 

이날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거주 중인, 이난영의 딸이자 김시스터즈의 멤버 김숙자와의 전화연결을 통해 김해송의 납북 전말과 가족에 대한 애듯한 추억, 미국 활동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35년 <목포의 눈물>로 엘레지의 여왕이 된 후 1936년 오카 란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을 하며, 그해 KPK 악단장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목포가요제에서 만난 두 살 연하의 첫사랑 남인수와의 생이별이었다. 

김해송과 이난영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김시스터즈(숙자, 애자, 이봉룡의 딸 민자)와 김보이스가 그들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한류가수라고 할 수 있는 김시스터즈는 우리나라 가수로는 처음으로 팝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진출했다. 

이날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스의 미국 라스베이거스 활동상도 공개됐다. 

그들 가족 중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해조곡>, <다방의 푸른 꿈>, <목

포는 항구다> 등을 불렀고, 작곡가 김해송은 <청춘계급>,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선창> 등을 작곡했다.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은 <낙화유수>, <아주까리 등불>, <고향 설> 등 주옥같은 애창곡을 남긴 바 있다. 

<목포는 항구다>를 만든 작곡가 이봉룡(1914~1987)은 김해송의 처남이다.


당시 목포는 삼백(쌀·목화·소금)의 도시라고 불렀으며,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때에는 이 쌀과 목화, 소금을 강제로 수탈당한 애환의 도시다. 

또한 목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섬마을을 오고간 헐벗고 굶주린 서민들의 눈물이 어린 이별과 상봉의 장소였다.



글·사진 : 유차영(한국유행가연구원장/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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