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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예유차영의 아랑가 ① 1926년 사의 찬미


[유차영의 아랑가] ① 

1926년 사의 찬미 

"눈물로 된 이 세상 나 죽으면 그만일까" 

윤심덕 / 이바노비치 / 윤심덕 


우리나라 가수가 최초로 부른 우리 유행가 1호. 이 곡은 헝가리 작곡가 요지프 이바노비치(루마니아 군악대장 소령, 1845~1902)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 멜로디이다. 

1926년 8월 3일 일본 닛토레코드사 녹음실, 이 멜로디에 윤심덕이 가사를 지어서 스스로 부른다. 그녀는 이 노래를 단 한 번 부르며, 음반으로 남기고 그 날 저녁 이승을 등졌다. 

작사·작곡·가수는 대중가요 3대 요소다. 하지만 이 곡은 멜로디가 헝가리 곡이므로 우리나라 가수가 부른 유행가 1호라고 기술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가사 전문) (※세간에 회자되는 다른 가사도 있음.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등)

이 곡은 윤심덕이 직접 부르며 녹음하였으며, 피아노 반주는 그녀의 남동생 윤성덕이 하였다. 

윤심덕은 이날 녹음을 마치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을 하다가 8월4일 새벽 1시에서 4시 어간에 대마도 인근 현해탄 바닷속으로 뛰어내려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1923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음악활동과 교사생활을 했었다. 1926년경부터는 극단토월회 ·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연극 관계로 알게 된 이기세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간다. 당시 유행하던 번안가요 <메기의 추억>, <어여쁜 새악시> 등 10여 곡을 취입하기 위하여.

그녀는 그날 저녁 부산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사랑하는 연인, 일본 유학시절 만난 호남갑부(장성군수 역임, 김성규)의 맏아들인 동갑내기(1897년생) 유부남 김우진을 끌어안고서 현해탄 파도 속으로 뛰어든다. 이들이 남긴 유서는 "김수산 윤수선"이었는데, 이 유서는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유서'가 되었다. 

그녀는 1920년대 일본제국주의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이었으며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일본에서 성악(소프라노)을 전공한 인텔리다. 그즈음 같이 유학을 한 우리나라 여성은 영화 전공 김원주 (수덕사 여승, 일연 스님, 유행가 <수덕사의 여승> 주인공)와 서양화전공 나혜석이다.


윤심덕이 참여했던 토월회는 1923년 5월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연극공연 단체. 첫 출발은 신원회라는 문예동아리였지만, 현실인 땅을 지키며, 이상인 달을 좇는다는 의미로 이름을 바꾼다. 박승희·김복진·김기진·이서구 · 김을한·박승목·이제창이 주축 멤버였다. 그해 7월 4일 귀국을 해서 조선극장에서 첫 연극공연을 하였다. 

이들은 87회를 공연하고 1931년에 해산한다. 공연장과 전문 연기인의 부족이 해산 이유였다. 이들의 해산에 일본제국주의의 간계는 없었을까. 뒷손 같은 강압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타고 온 관부연락선은 그 이름에도 민족자존심이 걸려 있다. 우리는 관부~, 일본은 부관으로 통용한다. 부산항 제1부두와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던 여객선. 1905년 1월 1일부터 운행한 경부선 열차와 연계하여 그해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운행한다. 부관은 부산의 부와 시모노세키의 뒤 글자 관을 붙인 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대륙진출을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 산요기선주식회사에 의하여 처음 운항되었다.


이 연락선은 일본의 한국침략 수단이었다. 수많은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강제 징용되어 이 배에 실려서, 일본국 군인으로서 전쟁터와 전쟁물자 채취현장으로 이송되었으며,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종군위안부들도 이 배를 탔었다. 처음 취항한 연락선 이키마루(1,680톤)는 11시간 반이 소요되었고, 그 뒤 3,000톤급 쇼케이마루·도쿠주마루 · 쇼토쿠마루 등이 운항되었다. 1935년부터는 북중국·만주·몽골 등지로 진출하면서 7,000톤급 공고마루 고안마루 등을 운항하여 7시간 반으로 단축하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동반자살을 한 대마도 인근 현해탄은 대한해협이다. 검은색 바다물결 쿠로시오해류가 흐르는 바다,

탄은 강물에서는 여울이라는 의미인데, 바다에서는 해심200미터 내외를 칭한다. 해운대 동백섬과 일본 규슈 사이는 약 200km의 폭과 50~220m 정도의 해심이다. 해운대에서 대마도는 49.9km, 1년에 47일 정도는 신기루 같은 형체가 보인다. 이 해협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애치슨라인(1950년 트루먼 발표. 한반도는 미국 극동방어선 밖)이 북한이 625한국전쟁 남침을 감행한 주요 원인이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태어나 경기여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사범부속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우에노음악학교로 유학을 가서 성악(소프라노)을 전공하였다. 그 곳에서 연극 활동에 참여하던 중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유학하고 있던 동갑내기 유부남 김우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김우진은 목포 심상소학교를 거쳐 1915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한다. 그는 구한말 박정양 대감의 아들 박승희(1901.8.17~1964.7.15) 극작가가 이끌던 토월회 배우이며 극작가로서, 1916년에 일시 귀국하여 하동 정씨 정점효와 결혼하여 처자식을 가진 유부남이었다.

 박정양(1842~1905)은 조선후기 문신·외교관·내각총리대신 · 대한제국의 정치가다.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의 첫 주 미국대사다. 박승희는 그의 삼남이었다.

 <사의 찬미> 노래는 단 한 번 녹음으로 100년을 흘러오는 국민 애절곡이다. 2020년 트로트 열풍의 씨앗 같은 노래다.

글·사진 : 유차영(한국유행가연구원장/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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